제3이스라엘이 되려면 -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009권 PDF전문보기

제3이스라엘이 되려면

다시 말하면 예수가 오기 전까지의 영계가 제1이스라엘이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제2이스라엘이요, 예수의 주권을 통해서 이루어질 선하고 참되고 영원한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제3이스라엘입니다. 예수는 제3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런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적구원의 표준만 세우게 되었으니, 오늘날 다시 전세계의 인류를 이끌어 가지고 제2이스라엘의 기준까지 다시 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재림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제3이스라엘을 소망으로 하여 나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끝날에는 내적으로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오시는 주님은 영계를 제1이스라엘로 삼고, 이 세계의 인류를 제2이스라엘로 삼아, 이 땅에 참부모로 나타나 가지고 승리적인 아들딸,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나타나기 전에는 제3이스라엘이 이 땅 위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제3이스라엘이 이 땅에 세워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귀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그런 형태를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영계를 통하는 신령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는 영적 신랑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믿어 나오고, 영계의 지배를 받으며 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영계 제일주의로 나왔지만, 이제 끝날이 되어 넘어가는 때에 처한 우리 인간들, 다시 말해 제2이스라엘이 되는 이 땅이 영계를 지배하여야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오시는 주를 모실 수 있으려면 그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결하며 흠이 없는 자가 되어 주와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신랑되신 주님이 사랑할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추어 어린양 잔치에 참예해야 합니다. 그 식이 끝난 후에 참부모로 등장하시는 주님과 사랑의 인연을 거치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제3이스라엘이 못 됩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의 부모는 부모 같아도 부모가 아닙니다. 처자 같아도 처자가 아닙니다. 자녀 같아도 자녀가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구보다도 하늘을 더 사랑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없고, 그런 자리에 나갈 수 없다면 심판받습니다. 자기 아들딸 혹은 처자, 혹은 사랑하는 사람때문에 갈 길을 못가는 사람들은 심판받아요.

복귀섭리는 천리원칙에 따라서 합니다. 심정적인 기준을 복귀해 나가는 것이 해원의 원칙입니다. 천지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가지고, 타락으로 말미암은 죄의 관념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없는 것이 한입니다. 오늘날 이 천지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제 주님이 와 가지고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구름 타고 와요?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무리를 깨우치기 위해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인간은 참부모를 잃어버렸으니 그 참부모를 잃어버린 경로를 따라 복귀해 나가야 됩니다. 나는 그리워합니다. 여러분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참부모의 사랑의 심정이 어떠한지, 참부부의 사랑이 어떠한지, 참자녀의 사랑의 인연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몰라요. 성경을 보십시오. 과부나 고아와 같은 인간이라 하였습니다. 세상 인간들은 부모가 있어도 고아입니다. 남편이 있어도 과부입니다. 본연의 원칙을 두고 볼 때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기준, 심정적인 하나의 발판을 향해 전진하는 역사이기에 우리는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서 외칩시다. 우리는 마음을 모두어 엎드려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당신이 이상으로 삼고 세우시려던 참부모의 사랑의 심정이 어떤 것입니까? 참부부의 정리가 어떤 것입니까? 참형제의 인연을 어떤 것입니까?' 라고.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그런 기준을 이루어 놓기 위해서 심정적인 복귀역사를 해 나오십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의 모체였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는 복귀역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을 세워서 역사하셨습니다. 부모가 깨졌으니 자식을 통해서 역사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구원이란 명사가 필요없어야 할 그들 앞에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