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수난 속에서 발전하는 것
그러면 종교는 언제 발전하느냐? 고통을 당하고 수난받을 때에 발전하는 것입니다. 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가망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망성이 있는 때에 하늘이 역사하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든지 반드시 핍박받을 때에 발전하게 마련입니다. 만약에 핍박이 없게 될 때는 통일교회면 통일교회는 어떻게 발전해야 하느냐? 자진해서 수난길을 취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전세계가 통일교회의 이상대로 될 때까지 통일교회는 사회와는 반대의 길을 자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왜? 악한 세계와 선한 세계는 다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통일교회를 세계에서 환영한다고 해선 통일교회 교인들이 '자, 이제 세계에서 환영하니, 지금까지의 우리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때가 됐으니 우리도 사회서 하는 것 다 하고, 그렇게 가자꾸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 반대를 안 하면 안 할수록 통일교회는 자진해서 '악한 세계에 우리들이 영향을 미쳐 가지고 그 환경을 소화하려니 그 반대의 수난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 이 핍박의 길이 언제 끝날 것이냐? 언제 통일교회 이상을 다 이룰 것이냐?' 이럽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통일교회의 출발 당초부터 하늘이 바라는 본연의 자세와 비교해 볼 때 틀린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성경 요한계시록에도 말하기를 '끝까지 참고 이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한 것입니다. 끝까지라는 것은 전체를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예요. 어떠 어떠한 것은 남겨 놓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나라가 반대하는 것도 들어가고, 자기 친구의 배반이라든가, 가정의 배반이라든가, 부모의 반대라든가, 처자의 반대 등 전부가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일신, 전체의 환경도 다 들어간다구요. 그러한 전체가 반대하는 상황에 있어서도 이것을 극복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 끝까지라는 말은 하나님의 복귀섭리노정, 구원섭리에 있어서 힘든 것이 있으면, 그 힘든 하나님과 동참할 수 있는 자리에서 뜻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참한 자리를 소화시킨 자리에서 뜻이 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회 역사를 두고 볼 때 통일교회 역사는 수난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 한 마디로 말하면 행복의 역사가 아니고, 수난의 역사요, 비참의 역사였습니다. 거기서 남아진 게 뭐냐? 그 비참의 역사를 소화할 수 있고, 이 비참의 역사를 정상의 역사 이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게 위대한 것입니다. 또, 그 비정상적인 환경을 피해 가면서 할 수 없이 맞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전진해서 더 큰 비참의 길을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통일교회와 통일교회 교인이 자랑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통일교회에 보탬되는 길이 없었고, 하늘에게 협조받을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결론을 짓고 보게 될 때에, 내 자신부터 '이제부터 또 해야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하나 안 됐으니까 또 해야지. 하나님이 있구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편안히 가면 좋겠다. 이제는 나이 60이 됐으니 편안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그렇게 핍박을 받고, 시련을 받으면서 그저 멸시천대 받고, 손가락질 받고, 어디가든지 전부 동네 개가 짖고 이렇게 천대받으며 이런 일생을 걸어왔으니 이제는 그런 길 좀 안갔으면 좋겠다' 하는 건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평범한 입장에서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도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 간다면, 지금까지는 통일교회에 하늘이 같이했을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하나님 뜻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외적 세계가 남아지는 한 하나님은 통일교회를 버리고 또다시 그 누구를 통해서 비참의 길을 논의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걸어온 나로서는 여기서 정지해 버리고 나만 후퇴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거쳐나가느니만큼 될 수 있으면 과거적인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현대적인 내용에 그 내용을 연결시킬 수 있는 책임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으면 새로운 출발은 보다 희망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정히 바라는 것입니다.